☆ 백범 김구/민족의 등불

이승만이 죽인 김구

세월이 가면 2016. 3. 13. 18:51

 

 

 

겨례의 스승 백범 김구

(1876-1949)

 

 

 

 

귀국 후, 선생께서 거주하셨고 순국하신 경교장

 

 

 

안두희가 흉탄 4발로

김구 선생을 살해하는 데 사용한 권총

 

 

 

 

 

당시 김구 선생이 입고 있었던 상의로

흉탄에 맞아 흘린 선혈이 묻은 모습.

 

 

 

 

흉탄들이

선생의 몸을 관통하고 나와

유리창을 꿰뚫은 흔적

 

 

 

순국 후에 임시로 단장되어 누워 있는 선생

 

 

 

 

선생의 서거소식을 듣고 몰려온 국민들

(1949년 6월 26일 오후)

 

 

 

국민장으로 치러진 선생의 장례식

(1949. 7. 5)

  


 

朴斗鎭(박두진)의 애도시 

 


噫(아) ! 白凡先生(백범 선생) 
*噫(탄식할 희, 아) 

 


우뚝한 바위 있더니 
모진 눈보라 거센 비바람 
어엿이 견디시고  
솟아있는 오롯한 푸른 뫼뿌리 시더니 
뫼 무너지듯 
아으 크낙한 바위 무너지듯 
온 겨레 가슴 징징징 깊으게도 
서러웁게 울려놓고 가시었도다. 

나라 위하여  
뜨거이 피 뛰는 가슴으로 막아내시던  
敵(적)의 쏜 彈丸(탄환) 
하나 아직도 뽑지 않고 가슴에 지니신 채 
이는 또 鳴呼(명호)!  
쏘는 스스로의 겨레에게 너머 지시었도다. 
*鳴呼(울 명, 부를 호)!

 

나라를 찾기 위해 나라를 떠나 
머언 쓰리게도  
이역에 五十年(오천년)을 내 살인 듯  
故國江山(고국강산) 어루만져 바라보며 
이슬을 饌(찬) 삼고  풀밭에 잠을 이뤄 
敵(적)과 또 不義(불의)의 앞에 서는 
아으 咆哮(포효)하는 怒濤(노도)요  
부디치는 우뢰요 바람을 이르키는 불길이시더니 
*饌(반찬 찬)
*咆哮(우르렁 거릴 포, 우르렁 거릴 효)
*怒濤(성낼 노, 큰 물결 도)

 

아으 나랏일 다 이루음 못보시고 
겨렛일 가슴에 아프게 안으신 채 
뫼 무너지듯 커다란 바람 잠자듯 물결 쉬듯 
아으 잘 감기시지 않는 눈 감으시고 
가시었도다. 

―뒷날에 뉘 있어  
스스로 나라를 사랑했다 이를 양이면  
스스로의 가슴에 조용히 손을 얹고  
이제 白凡(백범)가신 이의 생애에다
물어보지 않고는  
스스로 아무나 나라를 사랑했다  
생각하지 말아라― 


 

 

 

친일반민족 세력과

그들을 비호하는 이승만에게 살해당한

김구 선생

 

1949년 1월 8일,

친일반민족행위처벌법에 의거해 시작된

'반민특위'의 '친일반민족행위자 처단'은

 김구 선생과 국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고,

이 때 김구 선생은

처단대상자 260명의 명단을 만들기도 했다.

이 후 친일경찰들이 속속 구속되자,

위기를 느낀 친일경찰들은

국회의원들이 국회에서 남로당의 프락치 활동을 하였다는

'국회 프락치 사건'을 날조하여

1949년 5월 18일,

반민특위에 참가하는 국회의원 3명을 구속함으로써

'반민특위' 와해 공작을 시작하였고,

친일파를 자신의 정치적 기반으로 삼고 있었던 이승만은

자신의 충직한 부하인 친일경찰들을 구하기 위해서

1949년 6월 6일

경찰을 동원하여

'반민특위' 본부를 습격하고

'반민특위 특별경찰대'를 해산시키는 방법으로

'친일 반민족 행위자 처단'을 중지시켰다.

반민특위 활동과 이승만의 반민특위 본부 습격 관련 게시물

http://bbs2.agora.media.daum.net/gaia/do/kin/read?bbsId=K158&articleId=55908

이런 당시 상황하에서,

친일 반민족세력과 그들을 비호하는 이승만은

앞으로도 계속 나오게 될지 모를

'친일 반민족세력 처단 여론과 주장'을 확실하게 막기 위해서

1949년 6월 26일,

'친일 반민족세력 처단'에 중심에 서 있던

김구 선생을 암살하게 된 것이다.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은

김구의 임정에서 문화부장(문화부 장관)을 역임했다.

 

 

 

 

3. 암살의 배후

 

 

1) 국내의 배후

 백범 암살의 배후에 대한 진상 규명은 

사건 직후부터 지금까지 계속되어 왔다. 

이를 규명하는 데는 

범인 안두희의 증언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조직적 정치 암살의 경우 

몇 단계의 계통이 있고, 

암살 하수인으로서는 알 수 없는 

상부 세계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건 당시 관련자들의 소재와 활동, 

사건의 뒷처리에 대한 개입과 태도, 

안두희의 이후 활동에 대한 지원과 보장 

등에 대한 간접적인 증거들을 동원해야만 

어느 정도 윤곽을 잡을 수 있다.

안두희의 회고에서 볼 때 

암살을 총괄 지휘한 사람은 

'의혹의 모략군' 김지웅이었다. 

김지웅은 사건 당시 

안두희와 홍종만에게 자금을 제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건후 안두희를 면회와서 

겸연쩍어 하면서 돈봉투를 주고 가기도 하였다. 

그런데 안두희는 

김지웅의 '눈부신 부상'에는 배후가 있으며, 

그것은 국가 고위층이라고 확신하였다. 

결국 안두희는 

암살 사건의 배후에 김지웅 이상의 선이 있다고 

분명하게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 상부의 동향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 수 없는 지위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회고를 통해 

암살의 배후인물로 

국방장관 신성모, 외무부장관 임병직, 

서울시경 국장 김태선, 

수도경찰청장 장택상, 경무국장 조병옥 

등을 거론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할 점은 

월남 이후 자신의 활동전반과 관련되어 

이들이 거론된다는 사실이다. 

서북청년회 시절 도움을 준 이들과 

암살사건에 직접 관련된 이들을 

구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거론된 사람들과 관련하여 

먼저 경찰쪽을 보면, 

안두희는 서북청년회 시절 

평소 노덕술, 최운하 등과 정보를 교환하였으며, 

장택상, 조병옥 등 

경찰수뇌부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장택상과 조병옥은 

안두희의 백범 암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김태선 서울시경국장은 

김지웅에게 자금을 지원한 사실이 있고 

그 돈을 지원받은 김지웅은 

홍종만 등과 같은 암살 관련자들에게 

지급한 사실이 인정된다. 

사건 당시 안두희가 소속되어 있는 군부를 보자. 

먼저 포병사령관 장은산은 

서울대병원에 입원하여 

암살을 직접 명령·지휘하였다. 

안두희의 『마지막 증언』은 

장은산의 구체적인 지시와 개입을 

너무나 생생하게 회고하고 있다. 

장은산은 사건후 미국으로 유학갔으며, 

전쟁 발발 직후 미국에서 돌아와 

'내가 안두희의 보스'라며 

백범 암살 사건에 대해 잘 안다고 주장하다 

김창룡에 의해 '적전이탈' 혐의로 구속되어 

유죄판결을 받고 복역중 

부산 육군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사망의 원인은 확실하지 않다.

당시 헌병사령관은 장흥이었으나, 

마침 사건 당일 성묘를 하러 시골에 갔기 때문에 

헌병부사령관 전봉덕이 안두희의 신병을 인수하고 

안두희가 폭행으로 많이 다쳤기 때문에 

조사는 하지 못한채 치료만을 해주었다. 

또한 암살 당일 

헌병들이 경교장 일대에 미리 배치된 것도 

의혹을 받을 수 있는 대목이다. 

헌병사령부의 당직사관이었던 오석만중위와 

사령관실에 근무하던 장석인소위의 증언에 따르면, 

헌병사령부 순찰과장 김병삼대위가 

암살사건이 일어나기 1시간전인 오전 11시 30분경 

사령부에 비상을 걸었으며 

사령부 본관 뒤에 찝차와 스리쿼터에 

헌병 15∼16명이 승차대기 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12시 40분경(김구 선생 피살 사건 발생 몇 분전) 

김병삼대위가 장석인에게 전화하여 

백범 암살사건을 

사령관에게 보고해 줄 것을 요청했으며, 

전봉덕 부사령관은 

보고전에 이미 사령부에 나와 있었다고 증언했다. 

전봉덕 부사령관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사건을 보고하자 

수사를 맡게 될 장흥 헌병사령관은 

임정계통이고 김구와 가까우니까 

사령관직에서 해임하고 

전봉덕 부사령관을 사령관으로 승진 발령한 것도 

의심이 가는 대목이다.

 

안두희는 특무대로 이송되어 

특별 대우를 받게 되는데, 

이에 개입한 사람은 참모총장 채병덕과 

특무대의 김창룡이었다. 

안두희는 그의 회고에서 

사건전에 김창룡을 만난 적이 있다고 언급했지만, 

그의 사전 개입은 

아직 명백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현재로서는 김창룡이 

사건의 뒷처리에서 누구보다 직접 개입하였다는 점은 

명백하다. 

 

김창룡과 더불어 

군부 고위층에서 적극 개입한 사람은 

채병덕이다. 

 

그는 헌병사령관 전봉덕에게 전화로 

안두희의 특무대 이송을 지시하였다. 

그는 또한 안두희가 이송되자 특무대를 방문하여 

이 사건 수사는 

노엽과 이진용이 하도록 명령하였으며 

홍영기 검찰관에게 

구형은 10년만 하면 적당하다는 

압력을 넣은 사실도 있다.

 

다음의 인물은 元容德이다. 

홍영기 검찰관은 총살형을 구형하였으나, 

재판장 원용덕을 비롯한 재판관들은 

종신형으로 선고하였고, 

그 후 원용덕은 

안두희 암살사건을 잘 알고 있는 김성주를 죽였다

(1954.4.17).

 

결국 군부에서는 
장은산이 사전에 직접 명령·지휘하였고, 

김창룡은 사건의 뒷처리에 적극 개입하였다. 

그외 전봉덕, 김창룡, 채병덕, 원용덕, 김병삼 등은 

외곽에서 나름의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윤곽의 범위로 볼 때 

국방장관 신성모는 당연히 의혹의 대상이 된다. 

신성모에 대해서는 고정훈이 이미 폭로한 바 있고, 

암살사건을 보고받고 

'이제 민주주의가 되겠군'하며 반겼다는 

최대교 당시 서울지검장 등의 증언이 있다. 

 

 

 

김구 선생 순국 당시의 대한민국 제 2대 국방장관

신성모 (1891-1960),

1949. 3-1951. 5 국방장관 재임.

 

뿐만 아니라 신성모는 김창룡과 더불어 

안두희의 수감생활을 보호하고, 

그의 감형, 잔형 정지, 잔형 면제, 석방과 육군 복귀를 

주도하였으며, 

전쟁중 부산에서 안두희를 불러 

모윤숙과 김활란이 보는 앞에서 

생활비까지 제공하였다. 

신성모의 개입과 관련하여 

세간에서는 그가 주도하는 '88구락부'가 

암살 사건의 진정한 배후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신성모가 

내무장관에서 국방장관으로 자리를 옮긴 직후, 

군부와 경찰관계의 핵심분자들이 

상호간의 정보 교류란 명목으로 만든 것이 

'88구락부'였다. 

여기에는 신성모 이외에 

채병덕 육군총참모장, 포병사령관 장은산, 김창룡소령, 

서울시경국장 김태선, 정치인 김준연, 

모략군이자 정치브로카 김지웅 

등이 참여하였다는 것이다. 

이들은 백범 암살사건의 기획과 뒷처리에 

나름의 역할로 적극 개입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신성모는 4.19 직후 

고정훈이 자신을 백범 암살의 배후로 지목하자 

충격을 받고 뇌일혈로 쓰러져 

1960년 5월 29일 사망했다. 

그런데 신성모가 사망한 이 날은 

공교롭게도 이승만박사가 하와이로 망명한 날과 

같은 날이었다. 

 

미국의 그래고리 헨더슨(Gregory Henderson)은 

한국의 이상돈 국회의원이 

미국 보스톤을 방문하였을 때, 

이의원 일행을 초청한 자리에서 

이상돈의원에게 

왜 이승만박사가 하와이로 망명했는지 아느냐고 묻고 

자기가 알기에는 

김구 암살 사건의 책임을 피하기 위해 도망온 것이다

는 말을 한 사실이 있는 것을 

이상돈 의원이 회고록에 밝힌 것이 있다. 

헨더슨은 암살 당시 

미국대사관에서 근무했던 경력이 있는 사람이다. 

 

한독당에 대한 와해공작과 

암살사건의 계획 및 실행에 깊숙히 개입한 것은 

김지웅이었다. 

그는 안두희가 수감된 후 

재판과정에서 어떻게 답변할 것인가까지 

조언해주는 등 

사건의 마무리에도 깊숙히 개입하였다. 

그는 1950년대 중요한 정치적 사건을 조작한 자였고 

4.19 직후 백범암살 진상규명 요구가 거세지자 

60년 8월 22일 밀항으로 일본의 福岡으로 도망쳐 

'내가 김구암살의 주모자'라는 이유로 

정치망명을 요청하였다. 

일본정부에서는 그의 망명 요구를 받아주지 않고 

밀입국자로서 처벌받고 풀려났다. 

일본 중의원에서도 

김지웅 문제가 제기되어 많은 논란도 있었다

(1966년 3∼4월). 

 

백범 암살사건의 배후에 가장 쟁점이 되는 것은 

역시 이승만대통령의 관련 여부이다.

 이 문제에 관한 안두희의 증언은 

'오락 가락' 하고 있다. 

그는 1961년 4월 김용희에게 체포되었을 때,

 '이태원 육군형무소에 있을 때 

이박사가 날 잘 봐주라고 했다'

는 말을 들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또한 권중희에 의한 1992년 9월 증언에서 

사건 발생 일주일 전인 

1949년 6월 20일경 

경무대에서 이승만을 만났으며, 

그 자리에서 이승만은 

"국방부 장관에게 애기 많이 들었다. 

높은 사람 시키는 대로 일 잘하고 말 잘 들어라"

고 격려한 적이 있다고 증언하였다. 

그러나 그 직후 안두희는 이 진술을 부인해 버렸다.

이승만의 개입에 대한 

다른 사람의 증언과 주장을 들어보자. 

이승만의 고문이었던 올리버 같은 사람은 

이승만이 이 사건과 관련 없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이승만이 직접 암살을 지시한 

증거나 증언은 없다. 

그러나 관련되는 간접적인 증언은 적지 않다. 

조소앙은 사건 며칠 전 

경무대로 이승만을 방문하였는데, 

그 자리에서 이승만은 

'백범이 공산당과 내통하고 있으며, 

그 주변에 빨갱이가 잠입했다'

는 보고를 받았으며, 

'백범이 몸가짐을 신중히해야 한다'

고 경고한 적이 있다고 증언하였다. 

다음 최대교의 증언이 있다. 

최대교의 증언요지는 

홍종만 등 7명에 대한 영장이 

당시 서울지검장이던 자신을 통하지 않고 

김익진 검찰총장이 직접 청구하였으며 

한격만 서울지방법원장이 영장을 발부했는데, 

이것이 이승만대통령의 지시라는 것이었다. 

최대교의 증언은 

적어도 사건의 뒷처리에서는 

이승만박사가 개입하였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최대교의 증언내용은 

법조계의 영장처리방식에 비추어 신뢰하기 어렵고 

이승만박사가 그러한 일에 관여되었다고 

볼 근거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증언이어서 

믿기 곤란한 것이다. 

한편 김성주의 죽음도 

백범 암살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으며 

이승만의 사후 개입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다. 

안두희 재판 당시 

서북청년단 부단장이었던 김성주는 

"애국자 안두희를 석방하라"

는 삐라를 법원 근처에 붙여 놓는 등 

안두희의 구명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한국전쟁중 유엔군의 북진시 

유엔군의 임명으로 잠시 평남지사를 역임했지만, 

이 때 이승만 대통령은 김병연을 임명하여 

이대통령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후 1952년 대통령선거때는 

조봉암의 선거운동을 도우는 등 

반이승만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는 김구암살의 배후자인 김지웅의 허위정보로 

1953년 6월 25일 

국제공산당원 혐의와 이승만 암살예비죄로 

헌병총사령부에 구속되었다. 

그러나 군법회의에서 7년형이 구형되자 

이승만대통령이 

원용덕 헌병총사령관에게 영문으로 된 메모를 보내 

김성주를 사형에 처하도록 명령했던 것이다. 

영문메모의 내용은 이런 것이다. 

 

General Won

 Kim Sung Ju, 金셩쥬 

now in jail must be sentenced 

to capital punishment-極刑. 

He was appointed governor 

of 평양 by 外國人 and tried 

to kill Moon Bong je 文鳳濟 whom 

the Government appointed as police chief. 

It is clearly treason case and must be treated 

as such. 

To prevent any such traitor in the future 

he must be punished according to the law. 

I told the Defense Minister 

and I am telling you now. 

Please see to that without delay 

and without much noise.

 S. R.


 

 

(*번역문)

원장군 

 지금 감옥에 있는 김성주는 

반드시 극형에 처해야 한다. 

그는 외국인이 임명한 평양지사였고 

우리 정부가 치안국장으로 임명한 

문봉제를 죽이려 했다. 

이는 분명히 반역사건이기 때문에 

응분의 처벌을 받아야 한다. 

장래에 그런 반역자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법에 따라 처벌되어야 한다. 

나는 국방부장관에게도 말했지만, 

당신에게도 명령한다. 

신속하고 아주 조용하게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리승만 

 

 위 메모는 이승만대통령 자신의 필체로 쓴 것으로 

대통령의 서명이 되어 있었는데, 

4.19 후 원용덕에 대한 재판에서 

원용덕이 스스로 법원에 제출한 것이고 

그 재판기록중에 있는 것이다. 

이 메모를 받은 원용덕은 

고민끝에 부하인 김진호와 상의하였더니 

김진호가 처리하겠다고 하면서 

7년 구형을 받고 선고를 기다리던 김성주를 

구치소에서 더 조사할 게 있다고 불법적으로 끌어내 

원용덕 사령관 자택으로 데려와서 

1954년 4월 17일 새벽 

그 자택에서 권총으로 살해하고 

방공호에 암장했다. 

이 사건은 7년 구형을 받은 김성주가 

법률상으로는 사형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대통령의 메모에 따라 

살인을 저지른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 

그 당시 김성주의 가족들은 

구치소에 면회를 갔으나, 

사람이 없다고 하여 면회도 할 수 없었고 

선고기일이라고 하여 법정에 나갔으나 

재판이 무기연기되었다는 통고를 받았을 뿐인데, 

1954년 5월 경 신문에 

김성주가 사형선고를 받고 그 집행을 당하였다는 

기사가 나와 있어 

가족들은 그 소식을 듣고 

국회에 청원을 내어 

당시 제3대 국회에서 조사위원회까지 설치되어 

조사한 결과, 

김성주의 죽음이 

판결에 의한 사형집행이 아니고 

불법한 것이라는 것은 확인했으나, 

그 때 여당인 자유당의 비협조로 

유야무야 끝나고 말았다. 

결국 이 문제는 4.19 혁명후에 

김성주 가족들의 고소에 의해서 

원용덕, 김진호 등이 구속되어 재판을 받게 되자 

모든 것이 드러났고 

그 과정 중에 이 메모가 제출되었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원용덕은 징역 15년을 선고받았고, 

문봉제도 위증죄로 처벌받게 되었다. 

결국 원용덕은 김성주를 죽인 후 

판결문을 위조하고 그 집행을 한 것처럼 

모든 서류를 작성한 것이 

백일하에 드러났던 것이다. 

그러면 

이박사가 왜 김성주를 없애라고 

지시했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그 당시 신문보도에 의하면 

포병사령부 대령 이기련이 증언하기를, 

"김성주는 

김구선생 암살사건의 내막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박사가 죽였다고 본다"

라고 하였고, 

김성주를 밀고한 사람은 김지웅으로서 

그는 김구선생 암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임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김성주 자신도 스스로 

"내가 안두희를 시켜 김구를 살해한 것"

이라는 사실을 친구들에게 공언한 일도 있듯이 

김성주도 

김구선생 암살과는 밀접한 관계를 가진 사람인 것은 

분명하다. 

다만 이승만박사와 사이가 나빠지자 

김지웅은 그를 국제공산당원으로 몰고 

이박사와 김지웅, 문봉제, 김태선 

등을 차례로 암살하겠다는 허위정보를 제공하여 

김성주를 살해하게 된 것이다. 

이박사의 메모 내용을 보면, 

법에 따라서 사형에 처하라고 되어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때 7년형을 구형받은 사람이 

사형선고를 받지 못할 것은 상식에 속하고, 

원칙대로 하자면 재수사를 하여 

사형을 선고받을 만한 죄로 

추가 기소가 되어서 새로운 재판을 받아 

몇 개월 후에나 

법적으로 사형 선고를 할 수 있을 것인데, 

김진호가 이박사의 메모에 따라서 살해한 것은 

김진호가 스스로 이박사의 생각에 반하여 

감히 범한 범죄라고는 보기가 어렵다. 

이러한 증언들과 아울러 

위에서 검토한 암살사건 이후 

안두희의 행적과 군부 등의 보호가 

적어도 이승만 대통령의 묵인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상의 것들을 고려할 때 

적어도 이승만박사는 

암살 사건에 대해 

도덕적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할 위치에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는 직접 명령은 내리지 않았지만, 

부하들이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리고 

그 부하들은 이박사의 뜻에 맞추어 

알아서 암살을 감행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2) 미국과의 관계

 

 

 백범 암살과 미국의 관련은 

해방후 한국 정치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안두희는 

1992년 4월 13일자 『동아일보』

로 보도된 증언에서 

미국의 관련성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였지만, 

바로 다음날 문화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이를 권중희의 강압에 의한 증언이라고 

전면 부인한 바 있다.

먼저 4월 13일자 안두희의 증언 개요를 정리하면, 

안두희는 

경무부장 조병옥과 수도청장 장택상 등의 소개로 

OSS의 한국 책임자 모 중령 등을 소개받았고, 

미군 OSS 한국담당 장교와 안두희의 서북청년단은 

긴밀하게 정보를 교환하였으며, 

미군 장교는 백범을 제거되어야 할 

'Black Tiger'라고 부르며 

백범 암살의 필요성을 암시했다는 것이다. 

 

안두희의 이러한 증언은 

본인의 말대로 강압에 의해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된다. 

OSS는 1945년 10월초 해체되었고, 

해방후 한국에 진주한 미육군 24군단의 정보기관은 

G-2와 CIC가 있었을 뿐이다. 

다만 안두희는 

미국 정보원들과 교분이 있었고 

그들이 백범을 싫어하는 것을 알게 되어 

그것이 백범 암살에 한 동기를 주었을 지는 

모르겠다. 

 

또한 『미외교문서』에는 

백범암살건과 관련하여 

미국무성에 보낸 전문 하나가 

공개되어 있다. 

그것이 

1949년 6월 27일 오후 5시발의 

2급비밀 지급(Confidential Priority) 

[전문 788호]이다. 

미대사관의 공식보고인 이 전문에는 

특별한 내용은 없다. 

전문은 '공식 비공식의 여러 정보에 의하면 

안두희는 한독당원이며, 

암살 동기는 대한민국에 대한 지지를 거부하고 

북한과의 합작을 주장한 

백범의 정치노선에 대한 불만'이라 밝히고 있다. 

요컨대 암살 사건을 

한독당내 노선 대립의 일환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전문은 또한 

김구선생이 국민적 추앙을 받고 있고 

암살사건에 대해 모든 사람이 비난하고 있기 때문에 

장례식에서 큰 혼란이 예상되나, 

경찰과 군대의 주도면밀한 준비로 

한국정부는 이를 충분히 수습할 수 있을 것으로 

밝히고 있다.

안두희의 그간의 증언, 

미군의 정보자료, 미대사관의 공식 보고 

등을 면밀하게 분석해보면, 

미국이 암살사건에 대해 상당한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는 보이지만, 

암살사건에 개입했다는 증거는 

현재로서는 없다. 

미국의 암살사건 개입여부는 

미국이 혹시나 가지고 있을 

CIC 관계 자료나 CIA 자료 등이 공개된 후에나 

밝혀질 것으로 보일 뿐이다.

 

 

출처: 대한민국 국회

'백범 김구선생 암살사건 조사보고서'

'3. 암살의 배후' 전문

(1995)

 

 

김 구 선생 암살범 안두희를

'정의봉'으로 척살한 박기서 의사

1996. 10. 23 의거

1998. 3. 1

'3. 1절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석방

 

박기서 의사를 본받아

의거를 하기를 원하는 분들을 위한

게시물(아래 링크)

http://bbs2.agora.media.daum.net/gaia/do/kin/read?bbsId=K158&articleId=56204

 

 

 

 

 

 간추린 백범 김 구 선생님의 일대기 (약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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