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범 김구/민족의 등불

민족의 등불

세월이 가면 2014. 6. 3.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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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한국 독립운동가·정치가)
 
[金九, 백범] 1876. 7. 11 황해도 해주~1949. 6. 26 서울.항일독립운동가·정치가.
 
1876년 8월 29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으며, 1892년(17세)에 우리나라 마지막 과거인 경시(慶試)에 응시하기 위해 해주에 갔으나, 매관매직을 보고 과거를 포기한다.  (그 당시 돈을 주고 과거를 대신 치르게 하거나 감독관에게 돈을 주어 과거에 합격하는 일이 많았다.)
 
 1894년(19세)에 동학사상에 심취하여 동학의 접주가 되는데,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친일정권은 일본군과 연합하여 농민군을 공격하는 한편, 동학교도 전체를 비적(匪賊)으로 몰아 탄압했다. 귀향길에 농민전쟁을 목도한 김구는 그해 9월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습격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뒤 배신한 우군(友軍) 이동엽(李東燁) 부대의 습격을 받아 대패했다.
(동학농민전쟁 1차는 탐관오리들을 몰아내기 위해 농민들이 일어났지만, 정부가 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외세의 힘을 빌리려다 일본군에게 점령당하게 된다. 이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의 내정에 적극적으로 간섭하게 되고 2차 농민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1895년(20세)에는 남만주로 건너가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일본군을 공격했으나 참패한다. 을미사변이 일어나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살해되자 충격을 받고 1896년(21세) 2월 귀국하여 치하포(河浦)에서 일본군 중위 쓰치다[土田壤亮] 를 때려 죽인 뒤 집에서 은신중 체포되었다. 1897년 사형이 확정되어 집행되기 직전 고종의 특사로 집행이 정지되었으나, 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의 압력으로 출옥하지 못했다. 1898년 탈옥하여 삼남일대를 떠돌다 하동 쌍계사(雙溪寺)에서 피신생활을 했다. 그해 가을 공주 마곡사(麻谷寺)에서 승려가 되었으며, 서울의 새절을 거쳐 평양근교 대보산(大寶山) 영천암(靈泉庵)의 방주가 되었으나 1899년 환속하였다.
 
1900년(25세)에 강화도로 건너가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는데, 1905년에 을사조약(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기 위하여 강제적으로 맺은 조약)이 체결되자 국민들에게 알리려 하지만 지식이 없고 애국심이 박약하여 계몽활동에 전념하기로 한다. 이후 1910년 8월 29일에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 매국노 이완용과 제3대 한국 통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형식적인 회의를 거쳐 한일합방 조약을 통과시켰으며, 대한제국은 이 길로 멸망하게 된다.
 
 1911년(36세)에 일본은 독립 운동의 싹을 없애기 위해 소위 안명근(安明根:안중근의 종제)사건의 관련자로 김구를 비롯한 160여 명의 독립 운동가들을 감옥에 가두어 혹독한 고문을 한다. 17년형을 선고받아 복역중 감형되어 1914년 7월 가출옥되었다. 
 
 1919년(44세) 3.1 운동이 일어나지만 일본의 악랄한 고문과 탄압을 뼈저리게 겪은 김구는 평화적인 만세운동만으로는 결코 나라를 되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안창호의 추천으로 임시 정부의 경무국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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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임시정부 신년축하회 기념촬영 (1920.1.1)
 
 1932년(57세)에는 청년들을 모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일본인 침략주의자들의 암살사건을 지휘한다. 1월 이봉창이 일본 천황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던졌으나 실패한다. 4월 윤봉길이 홍커우 공원에서 일본 장군들에게 폭탄을 던져 큰 피해를 입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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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범 선생과 윤봉길 의사 (1932. 4.26.)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여 일본의 폭격이 심해지자 임시정부를 장쑤 성[江蘇省]의 전장[鎭江], 후난 성[湖南]의 창사[長沙]로 옮기는 한편, 임정에 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6단체를 통합하여 한국광복전선을 결성했다. 이는 공세를 강화해가는 일본과 최후 결전을 앞두고 여러 갈래로 갈라진 민족독립운동 진영을 통합하고 결전태세를 갖추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었다.
1940년(65세)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민족주의자들의 단일정당조직으로 조선혁명당·한국독립당·한국국민당 등 3당을 한국독립당의 이름아래 통합하여 집행위원장에 추대되었으며, 임시정부 국무회의의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1941년(66세) 11월 25일 임시정부는 좌우합작의 이념적 통합을 실질적으로 보여주는 '대한민국건국강령'을 제정·공포했다. 이것은 통합된 단일정당조직이 단순한 물리적인 결합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념적인 융합차원으로까지 진전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정체였다.  12월 임시 정부가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한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은 미국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다.
  - 미국이 일본을 의도적으로 도발하여 진주만 공격이 발생함. - 시대정신 3부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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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식을 마치고. (1940. 9.17.)
 
1942년 7월에는 중국정부와 광복군에 대한 정식협정을 체결하여 연합군과 더불어 항일공동작전에 나설수 있는 기초를 마련했다. 1944년 4월 충칭 임시정부 주석에 재선되었으며, 부주석에 김규식, 국무위원에 이시영·박찬익(朴贊翊)을 선출하고 결전을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나온 학도병을 광복군에 편입시켰으며, 미육군전략처(OSS)와 제휴하여 국내침투를 위한 특수부대로 광복군특공대를 편성하여 국내진공작전을 세우고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전격적으로 항복을 선언함으로써 참전하지 못한 채 8·15해방을 맞이하였다.
 
1945년(70세) 11월 23일, 김구는 개인자격으로 김규식 등 임정 국무위원들과 귀국했고 다음 날 귀국 방송에서 동포들에게 단결하자고 호소를 한다. 그러나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회의(제2차 세계대전 후 전쟁처리 문제에 대해 미국, 소련, 영국의 외무상이 결정한 협정)에서 한국은 아직 독립할 능력이 없으니, 힘이 생길때까지 독립 정부 세우는 것을 미루고 미국,영국,소련,중국 4개국이 5년간 신탁통치한다는 신탁통치안이 결의된다. 이에 김구는 반탁투쟁을 하며 반대운동을 벌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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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포연설(1946년 9월). 조국분단의 고착화와 동족상잔의 비극을 내다 본 백범은 "오천년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나라는 독립국이고 자유민임을 확신하는 것이니, 우리의 주장은 공염불이 아니라 삼천만 동포의 일관한 신조이며 민족절대 명령" 이라며 단합을 강조했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께서 물으신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오직 대한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세 번째 물으셔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
"내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 백범 김구 -
 
이러한 가운데 한국문제는 유엔으로 넘겨졌다. 1947년 11월 유엔감시하에 남북총선거에 의한 정부수립결의안을 지지하며, 완전자주독립노선만이 통일정부수립을 가능하게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정치적 입장은 1948년(73세) 2월  '삼천만동포에 경고함'이라는 성명에 잘 나타나 있다. 독립진영의 재편성, 새로운 합작위원회의 구성, 신탁통치반대, 미소양군의 철퇴로 38선 철폐, 자주독립정부 수립 등이 그것이다. 
 
1948년 2월 26일 총선거를 감시하려 파견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입국을 북한이 거부함으로써 선거가능지역인 남한만의 총선거를 실시하자는 미국 제의가 유엔소총회에서 결정되었다.
이승만과 한민당계열이 선거를 주장하고 준비를 서두르자, "38선을 그대로 두고는 우리 민족과 국토를 통일할 수 없을 뿐만아니라 민생문제도 도저히 해결할 수 없다"고 하며 이들과 결별하고 민족자주와 조국통일을 위한 시도를 추진했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삼팔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구차하게 내 한 몸 편하기 위해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 <삼천만 동포에게 눈물로써 고함> 중에서 -
 
 김구는 1948년(73세) 4월 19일 38선을 넘어 평양에서 열린 전조선 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와 남북요인회담,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의 4자회담에 참석하고 5월5일 서울에 돌아왔다. 도착성명에서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통일조국을 재건하기 위하여 남조선 단정을 반대하며 미소양군의 철퇴를 요구하는 데 의견이 일치하였음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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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와 김일성 함께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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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범 김구 선생과 김일성 주석이 1948년 4월 22일 남북연석회의장으로 함께 걸어가고 있다. ⓒ2005 통일부 제공
 
그러나 5월10일 남한 단정을 위한 총선거가 실시되고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졌고, 9월 9일 북한이 정부수립을 선포하는 등 통일이 점차 불가능한 상태로 빠져들어갔지만 통일조국 실현을 위한 그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암살되기 한달전 "동족상잔의 유혈과 국토양단의 위기를 방지하고 자주·민주의 원칙하에 조국의 완전독립을 쟁취하려는 나의 주장과 태도는 변함이 없다"고 소신을 밝히고, 이승만과의 합작은 통일정부가 설 때만이 가능하다고 했다. 통일된 자주적 민족국가수립이 그의 최대의 목표였다.

1949년(74세) 6월 26일 집무실인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현역 장교 안두희(安斗熙)가 쏜 총탄을 맞고 서거했다. 장례식은 7월 5일 서울운동장에서 국민장으로 거행되었으며,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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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1949년 6월26일 경교장에서 흉탄에 맞아 조국통일의 염원을 간직한 채 서거한 백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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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9. 7. 5. 국민장 행렬.
 
그 뒤 1950년 6월 25일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전쟁이 발발하게 되고, 대한민국은 남과 북으로 완전히 나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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