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호 슬픈 영혼의 노래/자료

배호와 문주란

세월이 가면 2016. 6. 25. 06:35

문주란 vs. 배호





일반 대중들에게 우리 나라 대중가요 가수중 누구의 목소리가 가장 매력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마 모르긴 몰라도 남자는 배호님, 여자는 문주란님을 꼽지않을까 생각됩니다.
그 이유는 여럿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이
두 분의 깊이 있는 저음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요.

그런데 두 분이 60년대를 대표하는 2대 저음 가수였기에
두 분의 음색이 비슷한 걸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두 분은 비슷한 듯 하면서도 자신만의 독특함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배호님이 낮고 부드러운 저음에다 적당한 기교와 애절한 감정을 실어
흐느끼듯 심금을 울리는 남아다운 호소력의 일인자 였다면
문주란님은 독특하고 고급스런 음색으로 기교없이
절제된 감정으로 허무한 듯 달관한 듯 상처입은 영혼의 울림을 토해내는데
천하일품의 호소력을 가졌다고 감히 표현해 봅니다.
이런 걸출한 가수 두 사람이 동시대에 등장해서 함께 활동했다는 것은
당시 60년대 가요 팬들에게는 노래의 복음이었던 거죠.



그렇다면 두 분의 선후배로서의 교분 관계는 어땠는지 한번 살펴볼까요?

먼저 배호님은 1960년경 아직 10대의 나이에 외삼촌 김광빈 악단에서
심부름으로 시작해서 드럼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미8군 등에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드럼 실력이 일취월장하자 김광빈 악단의 드럼 연주자로 자리를 옮겨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천지, 문화방송등의 전속 악단으로 활동하였고
당시 김광빈이 만들어준 최초곡인 "굿바이"와 "사랑의 화살"을(1963년 - 21세)
김광빈 악단의 연주속에 외삼촌이 지어준 배호라는 예명으로 음반을 발표합니다.
그러나 아직은 애띤 그의 목소리에서 가수로써의 이름을 날리지 못하였고
김광빈의 도움으로 20대 초반에 자신의 악단인 "배호와 그악단"이라는
악단을 만들어 업소에서 본격적인 자신의 음악을 키워가게 됩니다.

그때 쯤 김광빈은 그에게 본격 데뷔 음반을 낼 수 있도록
자신이 만들고 연주한 "두메산골" "굿바이" "차디찬 키쓰" "녹색의 장미"
"사랑의 마술사" "그대만이" 등 6곡을 발표하게 합니다.(1964년-22세)
아직은 나이가 어렸기에 김광빈은 그에게 나이 들어 보이기 위해
훗날 그의 마스코트가 되어 버린 금테 안경과 모자를 씌워줍니다.
그의 이름은 특출한 리듬 감각으로 신명나게 드럼치며 노래하는 가수 배호라는
이름으로 유명세를 탑니다.
이때 국내 최고의 작사가인 전우(비둘기 집 등)와 나규호 콤비를 만나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한편 부산에서 노래와는 무관한 택시 회사집의 딸들중 막내딸로 태어난
문주란님은 1962년 약관의 12세 나이에 부산 mbc 주최 콩쿨대회에서 입상.
당시 부산 지방에 서 활동하던 작곡가 유금춘에게 픽업되어
{ 크리스틴 킬러} 와 { 내 사랑아 안녕} 을 발표한 것이 첫 녹음이었습니다.
그 후에 작사가 전우씨와 작곡가 백영호 선생에게 픽업되어
<동숙의 노래> 를 발표하면서 선풍적인 히트를 기록, 스타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1965년 - 15세 )

그러니까 가수로서의 첫출발은 문주란님이 순조로웠던 반면
배호님은 다소 무명 기간이 있었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두 분이 본격적으로 교뷴을 나누게 된것은 배호님이 서서히 히트가도를 달리면서
인기가수 대열에 오른 1967년 이후로 보입니다.

배호님이 1967년 3월, 힘들게 병상에서 녹음한 "돌아가는 삼각지"를 발표하고
그의 숨이 찬 목소리가 이내 세간의 화제가 되면서 방송사의 인기와
팬들의 성원이 이어져 이내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지는 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25세)
인기의 여세를 몰아 역시 병상에서 내놓은 "안개 낀 장충단 공원"은 더욱
큰 인기를 얻게되어 년말 MBC 10대가수에 등극을 시작으로
각종 가수상을 독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문주란님 역시 동숙의 노래 히트 이후 <돌지않는 풍차> <내 몫까지 살아주> <타인들>
등의 연속 히트로 1966. 1967년 연속 10대 가수에 등극하였습니다.
극장쇼 무대에서 숱하게 함께 노래한 두 분이지만 10대 가수 청백전의
시민회관 무대에서의 조우는 두 분 사이의 특별한 에피소드를 만들어냅니다.
이른바 불세출의 두 저음 가수의 상대방 노래 모창하기.*^^*

1967년 서울시민회관(현재 서울시의회회관)의 ‘10대 가수 쇼’에서
문주란님이 먼저 굵직한 목소리로 배호님의 노래를 흉내내자
배호님도 이에 뒤질세라 문주란님의 귀엽게 톡 튀어나온 윗입술을 흉내내며
성대모사를 해 관객들을 웃겼던 것입니다.
손가락으로 자기 윗입술을 앞으로 잡아당겨서 말입니다.

그 이후 두 분은 친남매 같은 교분을 돈독히 나누었습니다.
동시대에 함께 등장한 최고의 저음 가수인 두 분을 함께 묶어 다양한 극장쇼가 기획되었고
정훈희, 남진, 이상열 등과 동료 가수 이전의 또래 청춘으로 친목도 다져나갔습니다
하지만 두 분 사이의 감정은 연정은 아니고 남매애에 기초한 우정으로 보입니다.
당시 또래 청춘 스타들이 함께 몰려다니다 보니 염문설도 없진 않았는데
문주란님은 남진님이나 이상열님과 좋아하는 사이라는 헛소문이 났었고
배호님은 정훈희와 사귄다는 염문설이 났었습니다.



오히려 배호님은 문주란님이 아니땐 굴뚝에 연기 난다고 엉뚱한 헛소문에 시달릴때
적극적으로 나서서 해명을 해주는 사이였던 것 같습니다.
< ... ( 전략 ) ....가수 배호씨는
문주란이 얼마전 터무니없는 뜬소문 때문에 고민하는 걸 봤다고
전한다. 그는 어떤 나이 많은 영감과 살고 있다는 소문이 있다면
서 억울해 못살겠다고 푸념하더라는 것..... ( 하략) ( 1969년 2월 23일 선데이 서울 22호)>

그렇게 돈독한 우애를 나누던 그들에게 어두운 그림자가 깃들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배호님의 신병이 깊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70년 6월 부터는 병의 악화로 외모가 달라지기 시작하더니
그렇게 유쾌하고 동료 가수들과 잘 어울리던 사람이 말수가 적어지며
공연 직전까지 분장실에 누워있다가 간신히 자기 차례가 되면
노래하고 내려오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그러다 70년 10대 가수 청백전때는 분장실에서 대기중 쓰러져서 사회자 최성일과
이대성의 등에 업혀 간신히 노래를 불렀습니다.



배호님의 병이 깊어지자 그 누구보다 문주란님이 애통해했던건 물론이죠.
당시 문주란님은 활동이 여의치않아 슬럼프에 빠져있던 시절이라
그 아픈 마음이 배가했을 듯 합니다.
그러나 문주란님의 애통함에도 불구하고 배호님의 병세는 더욱 깊어져서
급기야 71년 11월 지병인 신장염으로 세상을 등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당시 문주란님의 슬픔이 얼마나 컸었는지는 다음의 인터뷰에서 잘 드러납니다.



< ....“참 재미있었어요. 그 시절 팬들도 요즘 오빠부대 못지 않았어요.
어딜 가나 구름처럼 몰려 따라다녔죠. 요새말로 치면 ‘스토커’같은 사람들도 있어서
힘든 부분이 없진 않았지만 무엇보다 즐거웠던 기억은 동료가수들과 가족처럼 지내며
울고 웃고 지낸 시간들입니다. 그 시절 연예계는 시쳇말로 군기가 엄청 강했죠.
하지만 그만큼 끈끈한 정으로 서로를 형제 이상으로 아끼고 살았답니다.
지금도 시간 나면 남진을 비롯해서 그 친구들과 자주 어울려요.
그런데 요즘은 돌아가신 분들이 많아 맘이 섭섭하고 허전할 때가 많아지네요.”
큰 눈을 반짝이며 옛날 이야기를 해주던 그녀의 낯색이 갑자기 어두워지는 듯 싶더니
가수 배호의 요절을 살아오면서 가장 슬픈 기억으로 떠올린다.
먼저 떠나간 친구의 이야기가 나오자 목소리가 더욱 저음으로 가라앉았다..... >

다음은 문주란님이 배호님 30주기때 가요무대에 출연해서 들려주었던
배호님에 대한 회상입니다.


마지막으로 두 분의 노래 교류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배호님은 생전에 문주란님의 <동숙의 노래>를 배호 스타일로 해석해서 취입하였고,
문주란님은 배호님의 대표곡 및 파란낙엽, 돌아가는 삼각지, 안개낀 장충단 공원.. 등
대표곡을 거의 모두 리바이벌 취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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